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유럽 연합 집행위원회의 소비자 조사 결과 유럽 가계의 저축 성향은 팬데믹 이전 수준을 계속 웃돌았으며, 여전히 소비자 신뢰도가 부진해 있는 상황이다. 팬데믹 시기에 봉쇄 조치가 이어지면서 소비가 급감하고 저축률이 급등했던 만큼, 경제학자들은 현재의 저축 패턴이 팬데믹 직전과 비교해 어느 수준인지 주시하고 있다.
유럽의 높은 저축 성향은 미국과 뚜렷한 대조를 보인다. 국제통화기금(IMF)은 강한 가계 소비 등에 힘입어 올해 미국 국내총생산(GDP)이 2.3%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유로존은 0.9%, 영국은 1% 성장에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이달 들어 중동의 적대행위가 악화하면서 에너지 가격이 다시 급등한 것도 유럽 가계의 물가 불안을 키우고 경기 회복을 더 어렵게 할 변수로 꼽힌다.
독일 싱크탱크 IMK의 제바스티안 둘리엔 연구책임자는 가계가 축적한 저축의 일부만 소비하더라도 소비에 상당한 힘을 보탤 수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올해 에너지 가격이 다시 오르면서 경제 전망에 다시 먹구름이 드리워졌다고 지적했다. 유로존의 가처분소득 가운데 상품과 서비스 소비에 쓰지 않은 비중을 나타내는 총저축률은 1분기 14.3%로, 팬데믹 이전 5년 평균인 12.5%를 크게 웃돌았다.
유로스타트와 영국 통계청 자료를 분석한 결과 1분기 수치가 집계된 유럽 18개국 가운데 14개국의 저축률이 팬데믹 이전보다 높았으며, 반면 미국의 저축률은 팬데믹 이전 수준을 밑돌고 있다. 유럽 가계가 소비를 꺼리는 배경에는 잇따른 충격으로 훼손된 신뢰와 함께 인플레이션 재상승이 현금 저축의 실질 가치를 깎고 생활 수준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자리 잡고 있다. 유로존의 7월 물가상승률은 2.9%로, 1년 전보다 크게 높아졌다.
높은 저축은 가계가 자금을 풀 경우 소비 주도의 경기 회복을 촉진할 여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독일 등 유로존 주요 경제권에서는 소비 행태가 뚜렷하게 달라졌다는 증거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다. ING의 마리커 블롬 수석이코노미스트는 탄탄한 상품·서비스 수요를 바탕으로 가계 소비가 미국 경제를 비교적 강하게 지지하고 있지만, 유럽 가계는 더 신중한 태도를 보이며 높은 저축이 소비의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베렌베르크은행의 홀거 슈미딩은 독일 같은 국가에서 노동시장이 여전히 견조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소비자 신뢰와 소비 부진을 실직 우려만으로 설명하기 어렵고, 팬데믹 이후 위기가 연이어 발생하면서 사람들이 부정적인 뉴스에 훨씬 민감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팬데믹 이후 한 위기가 끝나기 전에 다른 위기가 이어지면서 많은 사람의 미래에 대한 낙관론이 장기적으로 훼손됐다고 분석했다.
미국과 유럽의 금융자산 구조 차이도 소비 격차를 키우는 요인으로 지목된다. 유럽 주요국의 개인들은 미국보다 주식시장에 직접 투자하는 비중이 작아 증시 가치 상승에 따른 자산 증대 효과를 상대적으로 덜 누렸다. 유럽정책연구센터(CEPS) 등 싱크탱크 연구에 따르면 유럽 가계는 금융자산의 3분의 1에 조금 못 미치는 비중을 현금과 예금으로 보유하고 있다. 미국 가계의 현금·예금 비중은 12%에 불과하며 대신 주식과 투자펀드에 더 많은 자산을 배분하고 있다.
유럽 경제의 소비 회복 여부는 결국 가계가 높은 저축을 실제 지출로 전환할지에 달려 있다. 에너지 가격 상승과 인플레이션 불안이 이어질 경우 저축을 늘리려는 움직임이 유지되면서 소비와 성장 회복도 늦어질 수 있다. 반대로 가계의 불안이 완화돼 축적된 자금이 소비로 이동할 경우 높은 저축은 유럽 경기 회복을 뒷받침할 재원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김주완 기자 kjwan@hankyung.com